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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랍 속 단상

[서평]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 김혼비 작가

by 리스트레토비안코 2023. 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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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한 팀이 된 여자들, 피치에 서다)

김혼비 에세이 / 민음사, 2018. 06. 08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축구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책 추천, 서평

민음사 유튜브 월간 책 추천 영상에서 정우성 작가의 추천 책 중 한 권이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축구’였다. 어찌나 소개를 맛깔나게 하던지. 나도 모르는 사이에 홀려서 아 이 책은 꼭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e북을 장바구니에 바로 담았다.

 

사놓고 조금 시간이 지난 후에야, 책을 열었는데, 책장이 이렇게 잘 넘어갈 수가 없었다. 내용이 술술 읽혀서 손가락이 다음 장으로 가는 버튼을 계속 누르게 만들었다.

 

평소에 자기 계발서, 에세이 종류의 책은 잘 안 읽는 편이다. 특히, 제목부터 #힐링 #위로 #미라클모닝 이런 느낌이 드는 책은 멀리하게 된다. 읽어도 별로 와닿지도 않고, 그래서 어떡하라는 걸까, 이걸 몰라서 안 하나, 다 아는데 실천이 힘든 거지 등등 삐딱한 생각이 들어서 읽지 않는다.

 

그럼에도 김혼비 작가의 에세이는 남달랐다. ‘아 이래서 사람들이 에세이를 읽는건가’라는 생각이 들게 한 책이었다.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축구’는 마치 티비엔에서 8부작 시리즈로 만들 것 같은 한 편의 휴먼드라마 같았다.

 

책에는 김혼비 작가가 갑자기 축구가 하고 싶어져서, 아마추어 축구팀에 들어가서 겪었던 에피소드가 담겨있다. 물론 진짜 드라마처럼 캐릭터마다 서사가 있어서 고난과 역경을 헤쳐나가고 성장하는 흐름은 아니었다. 그리고 극적으로 김혼비 작가가 꾸준한 연습을 통해 축구 초보에서 갑자기 아마추어 구단을 이끌어나가는 대단한 실력자로 성장하는 스포츠 만화 같은 스토리도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 일상, 인생에서 울고 웃는 그런 순간들이 축구라는 스포츠에서 고스란히 드러나는 에피소드들을 작가의 유머와 재치를 곁들여 보여준다. 책을 읽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몰입하게 되고, 공감하며 답답해하다가도, 짜릿하고 후련한 기분도 들게 된다. 이야기를 읽으면 나도 모르게 웃다가 울다가 하게 된다. 그리고 문장 하나하나가 촌철살인이라 읽는 내내 너무 재밌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는 ‘로빙슛’ 편이다.

 

김혼비 작가가 속한 축구팀에는 전직 국가대표 출신부터 축구를 잘하는 사람들이 포진해 있었다. 그런데 다른 팀과 경기가 있던 날, 상대편 팀의 아저씨들이 훈수를 두는 장면이 나온다. ‘여자치고는 축구를 잘한다. 우리가 오늘은 봐주고 있는 거다.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저 얘기를 들은 후, 국가대표 출신이라고 말을 하니, 그들의 이야기는 ‘국가대표 출신인데 잘 티가 안나네요’를 시작으로 외모 평가로 끝났다.

 

앗, 어디서 많이 보던 모습이 아닌가.

뒷 부분이 궁금하다면 책을 꼭 읽어봤으면 좋겠다. 사이다 같은 결말을 만날 수 있다.

 

“그날 이후 회사나 일상에서 맨스플레인하려 드는 남자들을 볼 때마다 주장의 슛이 떠올랐다. 살면서 본 가장 의미심장한 슛이 아니었을까? 거기에 담긴 메시지는 매우 명확했다. ”나의 킥은 느리고 우아하게 너희들의 ‘코칭’을 넘어가지. “ 느리고 우아하고 통쾌했던, 잊지 못할 로빙슛! 러빙슛!

-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김혼비 지음) 중에서

 

이 에피소드가 끝났을 때 속이 다 시원했다. 현대인의 사회생활을 이겨낼 수 있게 해주는 명문장이었다.

 

그리고 다른 에피소드에서는 팀원들이 축구를 시작하게 되었던 각자 다른 계기, 축구 연습하다가 원효대사 해골물처럼 갑자기 깨달음을 얻은 이야기, 팀원의 부상으로 어려웠던 경기, 어딜가나 사람이 모이면 생기는 팀 내 갈등, 상대팀 소속의 부고와 조의금에 대한 이야기, 골을 넣겠다는 의지로 갔으나, 갑자기 골키퍼로 활약한 이야기 등 분명 축구 이야기인데, 우리가 살아가는 이야기가 다 담겨있었다. 책을 읽으면서 감동받았다가, 갑자기 울컥하기도 했고, 이런 게 에세이의 매력인가 싶었다.

 

앉은자리에서 금방 읽을 수 있는 책이었지만, 여운이 오래 남았다.

 

생각해 보면 살면서 축구를 직접 할 기회가 없었다. 초등학생 때도 그렇고, 중고등학생 때는 더했다. 축구라는 팀 스포츠를 자연스럽게 경험할 기회가 없고, 좋아하면 유별난 아이가 되기도 하고, 주변에 같이 즐길 사람이 없으니, 내가 축구를 잘하는지, 좋아하는지, 안 좋아하는지도 알 기회조차 없다.

 

책에서는 40대가 되어서 축구를 시작했는데, 자기가 축구를 이렇게 즐긴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람도 많았다. 축구를 시작하면서, 새로운 나를 발견하고, 사회적으로 고정된 역할의 범위를 넘어서면서, 삶의 활력소를 만들어가는 모습이 정말 멋있었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용기가 필요한 날들이 많을 텐데, 그때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축구를 떠올리면 힘이 되어줄 것 같다.

 

작가의 필력과 축구라는 소재가 만나 감동과 즐거움을 함께 주는 한 줄기 빛 같은 책이었다.

 

기억에 남는 문장

나는 정말 나는 정말 축구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사람들이랑 같이 하는 것은 두렵고 싫었다. 축구는 대체 왜 팀 스포츠인가. 한 팀에 열한 명이라니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 할 필요가 있을까.
- 인사이드킥 : 축구는 대체 왜 팀 스포츠란 말인가
나는 체력이 모기 같아서 망했다.
- 대인 방어 : 무엇이 축구 패션을 완성하는가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축구의 ‘추가 시간’을 부르는 용어는 꽤 다양하다. 가장 많이 사용되는 말로는 인저리 타임(injury time)이 있겠고 , 그 밖에도 로스 타임(loss time) , 애디드 타임(added time) , 엑스트라 타임(extra time) 등이 있는데 , 그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용어는 (우리나라에서는 별로 쓰이지 않지만) 스토피지 타임(stoppage time)이다. 스토피지 타임. 멈춰 있는 시간. 전광판의 시계는 멈춰 있지만 피치 위로는 시간이 계속 흐른다. 그 어느 때보다 밀도 높은 시간이. 앞으로 나의 축구도 그럴 것이다. 책 속 나의 이야기는 여기서 멈추지만 , 그 아래로 김혼비 축구의 시간은 계속 흐를 것이다.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원래 추가 시간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거니까. 하지만 축구와 함께 어디서든 즐거울 것이다. 무엇보다 김혼비는 추가 시간에 강하니까
- 스토피지 타임 : 축구팀에게는 꼭 이겨야만 하는 시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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